
영국에는 창문세가 있었다. 여섯 개가 넘는 창문을 가진 집만 과세대상이 되었으며 "7~9개는 2실링, 10~19개는 6실링, 20개 이상은 10실링으로 1696년 도입된 영국의 창문세(Window Tax) 세액이다.
창문의 숫자에 따라 세금이 늘어가는 것이다. 창문이 많은 집이 고급주택으로 평가되던 당시 국왕 윌리엄 3세는 부유층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걷기 위해 창문세를 도입했다.
창문세는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사람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창문을 없앴고, 신축 건물에는 아예 창문을 달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 시기에 건축된 건물에는 창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창문세는 숱한 비난 속에서도 1851년 7월 24일 폐지될 때까지 150여 년 동안 존속했다.
사실 창문세를 처음 만든 나라는 프랑스다.
1303년 필립 4세가 창문세를 신설한 이후 프랑스는 백년전쟁 중인 1370년, 프랑스혁명 직후인 1789년 모두 세차례 창문세를 도입했다.
프랑스는 영국과는 달리 부자들이 창을 넓게 낸다는 점에 착안, 창문 폭에 비례해 세금을 물렸다.
그러자 폭이 좁고 길이가 긴 창문이 유행했는데, 오늘날 낭만적인 '프랑스식 창문'은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역사를 보면 국가가 세금을 더 많이 거두기 위해 기울인 노력이 참 다양하다.
중소도시와 농촌의 난방용 화로의수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화로세(furnace tax), 표트르 대제가 매긴 긴 수염에 매기는 수염세, 잉글랜드 100년 전쟁 중 농부가 죽으면 군역을 필하지 않았다고 해서 영주가 장례식에 물리는 장례세 등 다양한 세금 종류가 있었다.
이집트 토지세의 성립
이집트 사람들은 세리 稅吏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 기하학의 발달 또한 토지세 부과와 관련이 있다. 나일강의 홍수로 인한 땅의 경계를 측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p15-16
인기 있는 세금 징수업
아테네인들은 세금징수업무를 민간인 세금징수업자 tax farmer에게 의존하였다. 각종 세금은 매년 최고가로 입찰되는 사람에게 경매되었는데, 이는 행정조직이 취약했던 고대국가가 정부의 수입을 확보하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 낙찰금액이 높을수록 업자가 납세자에게 세금을 더 뜯어내곤 했기 때문에, 징수업자는 미움을 받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p30
부자의 기부 의무 -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그리스인들이 선택한 방법은 부유한 사람은 큰 재정적 기부를 하고 그에 상응하는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BC 4세기경에는 아테네 전체 인구의 4%가 기부금을 제공하는 부자 계층에 해당했다.p33-34
로마
시저는 변방이 평화에 이르는 길은 무거운 과세를 통한 약탈 행위가 아니라 가벼운 과세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전임자들처럼 패배한 도시에 대해 무거운 세금을 물리지 않았다.p61
아우구스투스는 총독의 압제와 세금징수업자의 횡포를 모두 제거하는 새로운 방법을 도입했다. 전쟁세와 인두세라는 두 종류의 세금이 그것이다. 전쟁세는 재산의 1%의 세율로 과세되었고, 인두세는 성년의 남자(14-65세)에게 과세되었다. 이 제도의 장점은 단순했기 때문에 세금 징수인이 필요하지 않았다. p63-65
이슬람의 흥망
그들의 성공적인 정복사업은 종교적인 요인뿐 아니라 합리적인 세금 제도에 의해 지원되었다.p99
이슬람 정복자들은 기독교도와 유대인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같은 일신교도요, 성서의 민족들로 간주했던 것이다. p100
새로운 정부를 인정한 아랍인들은 국유지만 접수했다. 국유지가 아닌 개인 토지 소유자들은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자유를 얻었다.p101
남아있는 현지 주민들은 항복하기를 원했는데 다만 그들이 제안한 조건으로 항복하기를 원했다. 주민들은 항복조건을 둘러싸고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쪽은 소득에 비례하는 토지세를 내기를 원했고, 부자였던 다른 집단은 금액이 사전에 정해진 고정적인 토지세를 내기 원했다. p106-107
세금이야기, 전태영, 생각의 나무
(종교에서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코란이라 하여 이슬람을 강요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세금을 적게 내려고 이슬람으로 집단 귀화하는 것을 막았다.)
무슬림들은 피정복민들의 문화나 관습 및 종교 등을 보호해 주는 대가로 그들에게 무슬림들보다 많은 세금만을 요구하였다.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이슬람으로)을 막기 위해 오히려 개종금지백서를 발효하여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의 개종보다 공납을 요구했다. 201p
이슬람, 청아출판사, 이희수
중세기의 프랑스
필리프가 개발한 효과적인 세금 징수 방법 중 하나는 신민들에게 군에 복무하라고 종군의무를 요구하고 나서, 이를 면하게 해주는 대신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평민들의 경우 군복무의무를 세금으로 대치하기 위해 두 가지 형태의 세금이 생겨났다. 즉 농촌과 중소도시에서는 화로세furnace tax(가옥에 설치된 난방용 화로에 부과된 세금)가, 큰 도시에는 판매세가 생겨난 것이다. p127
근대 이전 영국
잉글랜드 국왕 리차드 2세는 백년전쟁 중 프랑스 침공에 대비한 전쟁 경비의 징수를 의회에 요청했다. 의회는 거지를 제외한 14세 이상의 성인으로부터 4펜스 징수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인두세는 불공평한 것이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같은 세금을 부담했기 때문이다. (1377) p150
의회는 누진적인 인두세를 입안하고자 시도했는데, 공작은 10마르크, 남작은 40실링을 부과하고자 했다. 그러나 상당한 토론 후에 의회는 14세 이상의 남녀 모두에게 구분 없이 1실링의 인두세를 부과하기로 결의했다.…농부들의 세금 부담은 사망세에 의해 더 무거워졌다. 농부가 죽으면 영주는 그가 군역을 필하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가장 좋은 짐승을 가져갔고, 성직자는 십일세를 다 내지 않고 죽었다는 이유로 두 번째 좋은 짐승을 가져갔다. 결국 좋은 재산을 뺏기고 난 농부의 가족은 완전히 가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 마침내 켄트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p151
(영국에서도 누진세 즉, 부자들에게 더 걷으려는 제도는 실패했고, 결국엔 세금에 억눌린 이들에 의해 봉기가 일어났다)
명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재정난
1592년에는 일본의 전국시대를 평정한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했고, 조선의 구원요청에 따라 명나라는 조선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1597년에 다시 조선을 침공했고 지휘관이 원균으로 바뀐 조선 수군과 명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1598년 가을에 히데요시가 죽고 오랫동안 지속되던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임진왜란을 명나라에 엄청난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텅 빈 국고를 보충하기 위해 정부는 높은 세금 인상을 단행했다. …이 세금을 매우 압제적이었기 때문에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p171-172
세금이야기, 전태영, 생각의 나무
출처 : 이광재북북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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