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유럽 상류층 “베풂은 자녀에게 물려줄 찬란한 유산”
○美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교육 핵심은 기부”
학생들 지역봉사는 기본
자선 펀드 스스로 조성
○ 美 아이스너 가문 ‘후계 훈련’
“제대로 써야 제대로 번다”
자녀에 기부대상 정하게 한뒤
효과담은 리포트 제출토록 해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앤도버 시에 있는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고등학교. 이 학교 교정 곳곳에서는 ‘논 시비(Non Sibi)’라는 라틴어 문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기심을 버려라(Not for Self)’라는 뜻으로 조지 워싱턴 등과 함께 미국 독립의 아버지로 불렸던 폴 리비어가 230년 전 학교 설립 때 만든 교훈(校訓)이다. 미국 최고의 명문 사립학교로 꼽히는 이 학교 학생들은 교훈에 담긴 의미를 새기며 사회봉사와 기부 활동을 통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을 훈련받고 있다.
기부문화가 실생활에 뿌리를 내린 미국과 유럽에서 취재팀이 확인한 것은 기부 활동이 단순한 동정심의 발로가 아니라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특히 기부 선진국의 사회 지도층은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기부 활동의 중요성을 가르쳐 이를 사회적 전통으로 키워왔다.

○ 기부로 훨씬 풍성해진 네덜란드 왕세자의 결혼식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동남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위트레흐트 시엔 네덜란드의 최대 기부단체인 ‘오라녀 펀드(Oranje Fonds)’ 본사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당시 율리아나 여왕이 네덜란드 왕가와 상류층의 기부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앞장서 이 단체를 만들었다. 2002년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돼 독립적인 시민단체로 바뀌었지만 왕실과의 인연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2002년 알렉산더르 왕세자와 막시마 왕세자비의 결혼식이다. 이 결혼은 아르헨티나 평민 출신인 막시마 비의 신분 상승으로 호사가들의 주목을 끌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미담이 있다. 결혼식장에서 왕실이 ‘기부 티켓’이란 형태의 독특한 축의금을 받은 것이다. 결혼식 하객들이 축의금을 낼 돈으로 기부 티켓을 사고, 이 돈은 곧바로 오라녀 펀드의 기부금으로 적립됐다. 결혼식 하객들이 이웃돕기를 실천하도록 왕가가 이끈 것이다.
오라녀 펀드의 상임간사인 요너 부셔스 씨는 “어릴 때부터 기부교육을 받은 왕세자가 왕족의 전통을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세자는 할머니 어머니의 기부 활동을 보며 자랐고, 기부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왕가의 기쁨을 모든 국민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기부 티켓이란 신선한 아이디어를 낳은 것이다. 이후 기부 티켓은 네덜란드에서 유행처럼 번져갔다. 왕세자 부부의 솔선수범을 상류층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일반인도 경사가 있을 때 기부 티켓을 발행하는 사례가 늘어갔다. 제대로 교육받은 지도층의 선행이 나라의 멋진 풍속을 만든 셈이다.

○ 기부문화 꽃피우는 기부교육
필립스 아카데미 앤도버 교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장면은 학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과목마다 실력이 떨어지는 학우를 성적이 나은 친구가 도와준다. 이 학교의 바버라 랜디스 체이스 교장은 “교훈에 걸맞게 타인을 돕는 걸 생활화하는 게 목적”이라며 “학교 클럽 활동도 지역사회 봉사나 자선 펀드 조성 등을 체험하도록 권장한다”고 말했다. 봉사를 강조하는 커리큘럼은 미국 명문대 입시에서 이 학교 출신들이 후한 점수를 받는 요인이 된다는 게 교장의 귀띔이다. 그는 “상류층 부모들 역시 자녀가 잘되길 바라는 욕망은 누구보다 강하다”며 “이들은 자녀의 기부 교육이 엘리트 교육의 핵심임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인디애나대 자선센터가 최근 발표한 ‘2008년 부유층 자선 연구’에 따르면 순자산이 100만 달러(약 12억 원)가 넘는 700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5.6%가 기부 동기로 ‘자녀와 젊은 세대에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또 기부 결정과 자선단체 선정 때 자녀들의 의견을 구하면서 기부의 중요성을 가르친다고 답한 사람이 95.9%에 달했다. 이런 교육의 영향으로 조사 대상자 40%의 성인 자녀들이 직접 자신의 기부 펀드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표적인 기부단체 중 하나인 캘리포니아커뮤니티파운데이션의 조남주 디렉터는 “한국에서 기부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기부 교육이 학교와 가정에서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제대로 쓸 줄 알아야 제대로 번다”
선진국의 사회 지도층은 왜 이처럼 기부 교육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이는 것일까. 취재팀은 해답을 얻기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이스너 재단 관계자를 만났다. 이 재단은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그룹 디즈니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던 마이클 아이스너 가문이 1996년 만들었다.
아이스너 가문의 후계자들은 어릴 때부터 ‘기부 테스트’를 거친다. 아이스너 재단은 해마다 800만 달러가량을 비영리단체에 기부하는데 이 가운데 일부를 가문의 젊은 자녀들이 직접 쓰일 곳이나 액수를 결정하게 한다.
그 과정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대상을 찾으면 해당 단체의 활동 명세 등을 세세히 따져본다. 그 다음 기부했을 때 기대되는 효과를 담은 분석 리포트를 작성해 재단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아이스너 재단 관계자는 “미국 상류층은 어떤 방식으로건 기부 교육을 받는다”며 “제대로 돈을 쓰는 법을 배워야 나중에 제대로 돈을 벌고 사회도 이끌 수 있다는 무언의 합의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민영 한국디지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서구 상류층은 가문의 긍지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엄격한 교육이 조화를 이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대물림하는 걸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다.
위트레흐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앤도버=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로스앤젤레스=길진균 기자 leon@donga.com
출처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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